어느 날 저녁, 아이가 영어 숙제를 하다가 "엄마, '배'가 영어로 뭐야?"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Ship"이나 "Pear"를 생각하며 아이가 물어본 단어를 바로 알려 주려다 멈칫했습니다. 대신 아이와 함께 스마트폰을 켜고 번역기 앱인 '파파고(Papago)'를 실행했습니다.
단순히 단어 하나를 외우는 것보다, AI 도구를 어떻게 활용하고 그 결과값을 어떻게 검토해야 하는지 가르치는 것이 더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제가 아이에게 영어 단어 암기 대신 번역기 활용법을 먼저 가르친 이유와 그 과정에서 발견한 놀라운 변화를 공유해 보려 합니다.
1. AI는 '배'가 먹는 배인지, 타는 배인지 모릅니다
아이와 함께 번역기에 '배'라는 한 단어만 입력해 보았습니다. 결과는 "ship(타는 배)"가 나오더군요.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엄마, 나는 먹는 배를 찾는데?"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때 아이에게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AI는 네 마음속 맥락(Context)을 읽지 못해. 그래서 우리가 정확한 문장으로 물어봐야 해."라고 말이죠.

그래서 아이가 이번에는 '달콤하고 시원한 배'라고 다시 입력했더니 "a sweet and cool belly(배, 복부)"라는 단어가 나와서 "누구의 belly가 이렇게 그렇게 달콤하고 시원한가~"라고 말하며 웃음이 났습니다. 우리 번역기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자! 번역기는 직역을 하는 듯 해서 이번엔 '먹는 배'라고 입력했더니 드디어 아이가 원하던 "Pear"라는 정확한 단어를 얻어냈습니다.


단어 10개를 외우는 것보다 '맥락의 중요성'을 깨닫는 10분이 훨씬 재미있고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2. 번역기 결과물은 '정답'이 아닌 '제안'일 뿐입니다
다음으로 제가 아이에게 가르친 것은 '검토하는 습관'입니다. AI가 내놓은 문장을 그대로 복사해서 숙제에 쓰지 말고, 다시 거꾸로(영어→한국어) 돌려보게 했습니다.
- 역번역(Back Translation) 체험: 번역된 영어 문장을 다시 한국어로 바꿨을 때 처음 의도와 달라진다면, AI가 실수를 한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바로 앞서 나왔던 한국어 '배'에 관련된 단어들을 입력하니 다행히 영어버전으로 잘 출력해 주었습니다. 전혀 다른 영어가 나왔다면 아이에게 역번역과 검토에 대한 부분을 한번 더 강조할 수 있었겠지만, 우리 집 파파고는 똑똑하네요.
- 비판적 사고: "AI도 틀릴 수 있어. 네가 아는 단어랑 비교해 봐"라고 격려하니, 아이는 자기가 아는 쉬운 단어와 AI의 어려운 표현 사이에서 고민하며 스스로 문장 구조를 뜯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전에 아이가 이순신 장군을 조사하는 과제를 하고 있을 때 '이순신 장군님은 어떤 음식을 좋아했어?'라는 질문을 챗GPT에게 했고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에서 '피자'를 즐겨 먹었다."라는 황당한 답변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아이는 피자가 외국음식이라는 것, 피자의 역사도 꽤 오래되었다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 피자가 조선시대에 넘어와서 이순신 장군도 즐겨 먹었다는 것으로 받아들이고는 신기해했습니다. 이걸 믿어 버리다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아직도 순수한 우리 아이 정도로 해 두겠습니다.
저는 그때 기회를 놓치지 않고 AI는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기보다, 그럴듯한 거짓말을 지어낼 때가 있다는 '할루시네이션(환각 현상)'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고 그래서 비판적 사고가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AI가 내어 준 답변을 온전히 믿지 말고 백과사전과 같은 검증을 거친 자료와 대조할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해 알려 주었습니다.
3. 도구 활용 능력이 곧 실력이 되는 시대
사실 사교육 시장에서는 여전히 단어 암기량을 강조합니다. 물론 기초 어휘력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2026년 현재,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모르는 정보를 얼마나 빨리, 정확하게 도구를 활용해 찾아내는가'가 실력의 척도가 될 것입니다.
파파고나 챗GPT는 단순한 '커닝 페이퍼'가 아닙니다. 부모가 곁에서 가이드만 잘해준다면,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1대 1 원어민 튜터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아이가 단어장에 코를 박고 단어를 외우는 시간보다, 번역기와 대화하며 문맥을 파악하고 단어의 미세한 뉘앙스 차이를 즐기는 시간이 더 늘어나길 바랍니다.
마치며: 언어 장벽보다 무서운 것은 '생각의 장벽'입니다
영어 교육의 최종 목적은 결국 '소통'입니다. AI 도구는 그 소통의 장벽을 낮춰주는 훌륭한 사다리일 뿐입니다. 사다리가 없는 환경이라면 소통은 결국 장벽을 오르지 못하겠죠. 그래서 부모인 우리가 아이의 옆에서 사다리를 잘 타는 법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격려해 준다면 아이는 더 넓은 세상의 정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아이의 영어 숙제를 도와주실 때, 단어 정답을 바로 알려주기보다 함께 번역기를 켜고 "이 표현이 왜 이렇게 나왔을까?"라고 대화를 시작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 사소한 대화가 아이에게는 가장 강력한 디지털 문해력 수업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