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셋 중 늘 듬직하게 자기 자리를 지켜주던 첫째는 저에게 늘 고마우면서도 안쓰러운 존재였습니다. 그런 첫째가 얼마 전, 대형 학원의 레벨 테스트를 보고 돌아오던 길에 결국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습니다. 테스트에 별 감흥이 없을 줄 알았는데,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긴 듯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평소라면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이야기했을 아이가 창밖만 내다보며 어깨를 들썩였습니다. "괜찮아, 다음에 잘하면 되지"라는 제 위로조차 아이에게는 공허한 소음으로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입술을 꽉 깨물고 눈물을 참아내던 뒷모습을 보며 마음이 참 안쓰러웠습니다. 저는 집으로 바로 가는 대신 동네 편의점 앞에 차를 세웠습니다. 지금 아이에게 필요한 건 영어 단어 하나가 아니라, 무너진 마음을 세워줄 따뜻한 온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편의점 컵라면이 가르쳐 준 아이의 진심을 오늘 포스팅에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편의점 컵라면 속 첫째의 진심
편의점 플라스틱 의자에 나란히 앉아 아이가 평소 좋아하던 진라면 순한맛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었습니다. 3분의 기다림이 왜 그렇게 길게 느껴지던지요.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 사이로 첫째가 드디어 입을 뗐습니다. "엄마, 나는 왜 노력해도 안 될까? 내가 머리가 나쁜 걸까?" 아이의 입에서 나온 자신을 자책하는 그 말들이 제 가슴을 콕콕 찔렀습니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다는 불안감, 동생들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는 부담감이 아이를 짓누르고 있었던 겁니다.
저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아이의 손을 가만히 잡았습니다. "아니야, 너의 노력은 결과지에 적힌 숫자로 다 담을 수 없어. 오늘 네가 흘린 눈물은 네가 그만큼 진심이었다는 증거야." 컵라면 국물을 들이키며 아이는 한참 동안 자신의 고민을 쏟아냈습니다. 그 고민들은 주로 첫째로서 느끼는 부담감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직접적으로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비언어속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아이에게 점점 부담을 주고 있었던 거 같아 미안해졌습니다. 그리고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 앞에서 아이가 부담을 느낄만한 행동은 더욱 조심히 해야 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학원 레벨이 곧 자신의 계급처럼 느껴진다는 아이의 말에 부모로서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컵라면 한 그릇을 비워내는 동안, 아이의 눈가는 여전히 붉었지만 표정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습니다. 자극적인 영상이나 게임이 줄 수 없는, 오직 마주 앉은 대화만이 줄 수 있는 치유의 힘이었습니다. 요즘 좀처럼 본인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데 컵라면 덕분에 아이의 진심도 들여다 볼 수 있어 참 유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회복탄력성의 힘
그날 밤, 아이는 집에 돌아와 오답 노트를 펴는 대신 저와 함께 '성공'이 아닌 '실패'에 대해 이야기를 더 나누었습니다. 아이에게 엄마도 예전에 열심히 준비했던 한자 급수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심정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시험에 떨어졌기 때문에 결과는 실패일지 모르지만 엄마는 너의 도움을 받아 최선을 다해서 시험 준비를 했다는 과정은 떳떳하다고. 준비하는 그 과정만큼은 엄마는 성공했다고 생각한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아이도 본인과 비슷했던 상황에서의 엄마의 이야기가 어느정도 이해가 가는 눈치입니다. 이번 테스트에서 무엇이 부족했는지가 아니라, '모르는 문제를 끝까지 붙잡고 고민해 본 나를 칭찬하기', '실패했을 때 어떻게 다시 일어설 것인가'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아이는 스스로 이번 시험의 실패 요인을 분석해 보겠다며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억지로 시켜서 하는 공부가 아니라,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기 위한 능동적인 움직임이었습니다.
이후 며칠 동안 첫째의 태도는 놀랍게 달라졌습니다. 레벨 테스트 결과에 연연하기보다, 자기가 몰랐던 개념을 하나 더 알아가는 과정 자체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컵라면을 먹으며 나눈 그 짧은 대화가 아이에게는 '넘어져도 괜찮다'는 안전망이 되어준 셈입니다. AI가 모든 정답을 알려주고 효율만을 강조하는 시대에, 우리 아이에게 진짜 필요한 건 '정답'을 맞히는 능력이 아니라 '오답'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컵라면 한 그릇의 위로
비싼 보약이나 명문대 과외보다 때로는 엄마와 함께 먹는 컵라면 한 그릇이 아이의 인생에 더 큰 이정표가 되기도 합니다. 첫째 아이가 그날 밤 저에게 남긴 한마디는 아직도 제 귓가를 맴돕니다. "엄마, 아까 라면 진짜 맛있었어. 나 다시 힘내볼게." 이 한마디는 저를 울컥하게 만듭니다. 제가 지난 10년 동안 육아를 하며 들었던 그 어떤 칭찬보다 값진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학원 성적 때문에, 혹은 보이지 않는 미래 때문에 아이와 갈등하고 계신 부모님이 계신가요? 오늘 저녁에는 잔소리 대신 아이의 손을 잡고 편의점으로 향해 보세요. 컵라면의 따뜻한 국물처럼 부모의 따뜻한 공감이 아이의 닫힌 마음을 녹이고, 다시 나아갈 힘을 줄 것입니다. 공부 습관의 시작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에서부터라는 것, 그것이 제가 첫째의 눈물을 통해 배운 가장 큰 가르침입니다.